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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노메 히메_여행
2021. 6. 23. 22:26트위터 @sprout_commi님의 커미션
언제부터 여길 걷고 있었을까. 주변을 의식하기 시작했을 땐, 여름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태양은 내 머리 위에서 내리꽂듯 빛을 내리고 있었고, 가만히 서 있다간 그대로 녹아내릴 것 같아 목적 없는 걸음을 시작했다. 고운 모래가 밟혔고, 바닷물이 발을 적시기도 했다. 그러다 그늘을 찾았을 땐, 숲속에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숲의 입구에서 나무에 손을 얹어보았다. 울창한 나무의 위엄과 거친 표면이 주는 촉감과는 달리 나는 이 나무에서 포근함을 느꼈다. 거대한 생명력을 마주한 느낌. 닿은 손을 타고 내게로 그 생명력이 흘러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꼭, 나무가 내게 숨을 불어넣기라도 한 것처럼.
포근함... 여름을 피해 숲으로 들어온 주제에, 이 숲을 감히 포근하다 말하는 것은 어폐일까. 하지만, 포근하다는 말을 떼어낼 수 없었다. 더위를 잊은 듯, 이 포근함을 내 몸 가득히 머금었으니. 그렇게 내 몸엔 숲이 담겼고, 그렇게 하루를 꼬박 이 숲을 거닐었다. 숲과 동화될 것 같았다. 여기에, 뿌리를 내리게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걸었다. 이 걸음에 맺힌 목적은 없어도, 내겐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으니까. 정처 없는 걸음이라 할 수 없는 것은, 이 긴 걸음의 끝 단 하나의 정처가 있기 때문이었다. 여행을 통해 다다르고자 하는 곳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여행이 끝나면 돌아가야 하는 곳이 있다. 그래, 그곳이야말로 나의 목적이겠구나. 그리하여 나는 걸었다.
숲에 사는 작은 생물들을 보았다. 푸드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잔상만을 남기고 사라지기도 하였고, 경계심 없이 내 앞에 나타나 고개를 갸웃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참으로 작아서, 건드리면 그대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들 주변으로 난 풀과 꽃도 그러했다. 꼭, 세상의 축소판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땅을 밟고 선 인간도 그러하니. 자연 아래 한없이 작고 여린 이들이지 않던가. 나의 작은 빛 역시 그러하였지. 떠오르는 한 사람의 모습에, 나는 이 작은 생물들로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작은 몸으로, 한없이 작은 몸짓으로 그들은 살아갔다. 숲의 생명력을 받아 하루를 살아갔고, 그러다 최후엔 숲이 되었다. 생명을 꺼뜨려 흙으로 돌아가, 이곳을 찾아올 또 다른 이의 생명력이 되어주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다시 뜨는 것을 몇 번이나 인지하면서. 그 짧은 새로 생명은 순환했다.
그렇게 알았다. 내가 여기서 나의 정처로 가져가야 할 것을.
자연을 가져가기로 했다. 지금 이 풍경 그대로 정처에 가져가야 했기에. 나뭇잎을 주머니에 담았다. 흙은 담기 어려워 손으로 만져보았다. 습한 공기에 부드럽고도 조금은 질척해진 흙이 손에 그대로 감겼다. 이 감촉을 편지에 담아 보낼 수 있을까. 선명히 기억하려, 조금 더 오래 그 것을 만지고 눈에 담았다.
걷다 보니, 습한 공기가 무거워져 찰나의 비가 되기도 했다. 하루쯤 내렸던가. 내게는 소나기와 같았다.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나뭇잎이 춤추는 소리가 났다. 멀리서 새가 우는 소리가 엮였다. 눈을 감고, 숨을 죽인 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나의 감각에 온몸을 기울이니, 자연은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어주었다. 아아, 역시 다음엔 함께 와야겠어. 어찌 이 자연을 활자로 다 담을 수 있을까. 자연이 주는 소리는 지금껏 들어온 선율 중 가장 아름다웠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선법과 기호로도 담지 못할, 오직 자연만이 가진 언어였고 음악이었다. 그대가 이걸 듣는다면, 마음에 안식을 찾을까. 문득 떠오르는 나의 정처에, 멈추었던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아갔다. 남은 소리는 함께 들어도 좋을 테니. 하나 급히 걸음하진 않았다. 어느새 이 숲에 뿌리를 내렸던. 늪을 걷는 이의 것처럼 내딛는 발이 무거웠다. 며칠 새에 이 자연으로 나 또한 얽혀든 것처럼.
숲의 출구를 앞두었을 때쯤, 결국 무거워진 걸음을 핑계로 다시 멈추어 섰다. 그리고, 들어섰을 때처럼 나무에 손을 얹었다. 맑게 개어 붉어진 하늘 아래로 커다란 나무는 여전한 초록빛을 뿜고 있었다. 그에 매료되어 하늘빛이 까매질 때까지 고개를 들고 있다가, 내게로 다가온 빛이 있을 때에서야 비로소 시선을 땅으로 떨굴 수 있었다. 하늘과 땅 사이, 내 옆으로 다가온 빛무리에 시선이 쏠렸다.
반딧불이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방인에게 호의적인 존재였던가. 잠시 의문이 스쳤지만, 곧 이 또한 자연의 포용이리라 이해할 수 있었다. 그에, 또 한 번 느꼈다. 이곳에 함께 와야 할 이가 있음을.
찰나, 나에게뿐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찰나’라밖에 불리지 못할 삶을 살면서 반딧불이는 참 밝게 빛났지. 그 작지만 선명한 빛을 보고 있자니, 땅의 밤도 찬란하게만 느껴졌다. 숲에서 지내는 며칠간, 하늘의 밤만을 바라보았거늘. 헤아리기 버겁던 별의 향연이 손에 닿을 듯한 거리에서 펼쳐져, 눈을 뗄 수 없었다.
이토록, 내 눈과 귀가 있음을 감사하게 될 줄이야. 자연은 위대했다. 이 순간을 담고 싶었다. 비단 나의 몸 안에 담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밖에 볼 수 없는 이 자연을 다음 순간의 다른 이들도 볼 수 있게, 그리고 다음 순간의 나도 되돌아볼 수 있게 남기고 싶었다. 돌아간다면, 사진을 배워볼까.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을까. 어떤 식으로든, 이 순간을 고스란히 남길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런 생각을 하며, 주변을 둘러싼 찰나의 빛을 보았다. 어쩌면, 짧은 생이기에 더 빛을 발할지도 모르는 것들을.
풀벌레 소리가 숲에서 멀어져 갈 즈음, 나는 나무에서 손을 떼어냈다. 어둠이 물러가고 있었다. 자연이 가진 가장 큰 빛에 희미해질 작은 빛무리를, 내 손에 잠시 담아보았다. 따뜻했다. 정말 이것이 온기를 지녔기에 느끼는 따뜻함인지, 혹은 빛을 봄으로써 느끼는 착각인지 알 수는 없었다. 아무렴 어떠하랴. 나는 그 따스함을 가르쳐준 반딧불이 조금 더 오래 세상을 날 수 있길 바라며, 모았던 손을 내려놓았다.
다시금 출구를 바라보았다. 새까맣게 물들었던 하늘은 아침을 드리우려 점차 흐릿해지고 있었다. 선명했던 먹빛 위로 물을 한가득 쏟아부은 것처럼, 그것은 그렇게 흐릿해져 갔다. 그 위로 위대한 빛이 나타나면, 그제야 나는 깨닫는 것이다. 내가 바라본 출구엔, 바다가 있었음을.
숲에서 빠져나오고 나니, 숲에 들어오기 전처럼 고운 모래가 밟혔다. 조금씩, 파도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수평선 위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하염없이 보았다. 붉은 태양이 푸른 하늘을 가르는 모습을, 그렇게 세상에 빛을 뿌리는 모습을. 꼭 바다에서 태어난 가장 뜨겁고 찬란한 별처럼, 그것은 그렇게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아주 느릿하게 떠올랐지만, 멈추어 서서 태양이 떠오르는 순간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지루하지 않았다.
바다의 소리와 채 그치지 않은 숲의 소리가 얽혀 나와 함께해주고 있었으므로. 시간이 멈추어버린 것도 같았지만, 그 소리를 들을 때면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생동하는 자연 속에서, 비로소 나는 커다란 숨을 쉬었다. 아침이 밝아왔다. 아침을, 내 눈에 선연히 담았다. 문득 발에 치이는 것이 하나 느껴져 몸을 숙였다.
소라고둥이 있었다. 아아, 이것이 좋겠다. 나는 그것을 들어 다시 나아갔다. 방향을 정하지 않은 여행. 그러나 정처는 있었다. 그곳으로 이것을 들고 가야지. 내 안에 품은 자연을 그대로 머금은 채 돌아가야지.
바다의 소리가 멎었을 때쯤, 소라고둥을 귀에 대 보았다. 이 또한 나와 같이, 저의 고향을 그대로 머금고 있었다. 그것을 귀에서 떼어내고, 또 다시 걸었다. 돌아갈 곳을 향해서. 나의 안정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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